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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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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노인의 꿈(정찬승)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3-10-16
조회 45317
치매 노인의 꿈
 
정찬승 원장(방배동 마음드림의원)
 
한 달에 한 번 내 진료실에 찾아오는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의 모습은 국제적인 멋쟁이였던 젊은 시절 그대로다. 윤기가 흐르는 멋진 밍크코트에 손가락마다 반지가 빛난다. 머리 단장이며 화장이 정말이지 근사하다. 처음 만나는 사람은 누구도 그녀가 치매를 앓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심지어는 자녀들도 머리를 갸우뚱할 때가 있다. 할머니는 노인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주변의 몸이 불편한 환자들을 도우며 말벗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치매 환자가 틀림 없다. 몇 달 동안의 입원 치료를 마치고 퇴원한 후 일주일만에 진료실에 들어온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누구시더라…?” 한 달에 한 번씩 외래에 올 때마다 묻는다. “정형외과 선생님이죠?” 또는, “재활의학과 선생님이죠?” 한참 대화를 나누다 보면 문득 생각이 난 듯 반가워할 때도 있다.
 
요양시설의 간호사가 꼼꼼히 적어 보낸 편지에는 할머니의 증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투약거부, 이자극성, 공격적 행동 등등. 멋스러운 치장도 일 년의 시간이 지나자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화장이 어색해지고 어깨에 걸쳐진 밍크코트는 비뚤어졌다. 한 손가락에 두 세 개씩 끼워진 반지는 무척 부조화스럽다. 보는 내가 불안하여 귀금속들을 잘 보관하시라고 조언해도 소용이 없다.
 
하지만, 할머니와 마주 앉으면 시간이 어떻게 가나 싶을 정도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자신을 극진히 사랑해주던 부친에 대한 추억으로 시작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지냈던 젊은 시절의 이야기, 이제는 저 세상으로 가버린 지고지순한 남편에 대한 그리움, 후손들의 성공담.
 
한 달에 한 번 진료실로 찾아오는 할머니가 매번 처음 들려주듯 이야기해주는 내용들은 나에게는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다. 할머니의 머리 속에는 새로운 기억들이 내려앉을 자리가 없다. 하지만, 할머니의 빛나는 과거는 여전히 슬픈 현재를 위로해 주고 있다. 그리고, 치매의 정신행동증상이 심해져 지칠대로 지쳐 진료실을 찾은 할머니는 보석처럼 빛나는 먼 옛날의 기억들로부터 위로를 받고 진료실을 나서곤 한다.
 
어느 날, 과거에만 매달리던 할머니의 마음이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됐다. 그것은 하나의 꿈이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나와 마주앉아 행복한 과거에 젖어있던 할머니는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오늘 꿈을 꿨어요. 하늘나라 꿈이었지요. 고운 구름이 꼭 바다의 백사장처럼 펼져져 있는데, 그 위에 남편하고 예수님이 함께 걷고 있는 거예요. 한참을 걷다가, 문득 남편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푹 숙여요. 저 앞에 걸어가던 예수님이 남편에게 “왜 거기 서있느냐?”하고 물어요. 남편이 고개를 들고 예수님을 보면서 이렇게 얘기하더라구요. “제가 서있는 바로 이 아래에 제 아내가 살고 있습니다. 제가 먼저 하늘나라에 와서, 혼자 사는 아내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웃으시며 말씀하시는 거예요. “허허… 네 기도를 들어줄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네 아내는 참으로 행복한 여자로구나.”
 
할머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행복은 과거의 영화에 기대어 맛보는 허영이 아니라 할머니의 영적 현실이 주는 신성한 충만감이었다.
 
가끔 치매에 걸린 환자 중에서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노인병원에서 근무하면 좀 특이한 경험을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저승사자’다. 임종을 앞둔 환자가 있을 때, 입원해 있는 다른 노인들이 검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저승사자를 보는 것이다. 물론 꿈을 꾸거나 병적 증상으로서 환시를 경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의료진이 “요즘 어느 환자가 위독하다.”고 다른 환자들에게 말하지도 않을 뿐더러, 다른 환자의 상태를 그렇게 자세히 알만한 인지능력도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데도 임종 며칠 전에는 부쩍 저승사자가 많이 나타난다. 치매로 인해 환자의 인지기능은 떨어지지만, 무의식은 여전히 기능하거나, 아니면 약해진 의식의 장막 너머에서 오히려 더 예민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 외에도 고향에 대한 꿈을 꾸거나 죽은 사람이 찾아오는 꿈을 꾸기도 한다. 치매 환자의 경우에는 꿈을 망상이나 환각과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굳이 구별하자면, 죽은 사람이 찾아오는 장면이 망상이나 환각이라면 그 증상이 오래 지속되겠지만, 꿈이라면 금방 잊혀지고 말 것이다. 아주 강렬한 꿈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꿈은 ‘휘발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잊혀진다.
 
다시 할머니 이야기로 돌아가자. 특이한 일은 그 다음 달에 일어났다. 한 달 후 진료를 받으러 온 할머니는 외로움과 서글픔을 한참 풀어내다가, 갑자기 “신기한 꿈을 꾸었다.”며 지난 달에 얘기한 그 꿈을 다시 꺼내들었다. 물론 나에게 이미 이야기해주었다는 것도 다 잊은 채 오늘 꾼 꿈이라며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할머니의 얼굴에 슬픔이 걷히고 다시 행복한 미소로 진료실을 나섰다. 그런 일은 매달 계속되었다. 주치의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할머니가 하나의 꿈을 한 구절도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잊혀지는 꿈들과 달리, 잊혀지지 않는 꿈들도 있다. 꿈을 만들어내는 무의식은 목적을 갖고 있다. 의식에 영향을 주어 정신의 온전함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의식이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어서 정신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무의식은 꿈을 보내 그 균형을 회복한다. 기계적인 균형을 맞추는 것과는 다르지만, 의식이 한쪽으로 치우칠수록 무의식은 강한 상징을 내보내어 의식에 충격을 주는 일이 자주 있다.
 
할머니의 의식은 오래 전에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기억력은 갈수록 쇠퇴하고 몸 단장도 흐트러지며 우울과 상실감에 예민한 행동이 잦아진다. 할머니의 무의식은 흐트러지고 추락하는 의식을 붙잡아주려 그런 꿈을 보내준 것이 아닐까?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 꿈이 잊혀지지 않도록 할머니의 뇌 어딘가에 그 꿈을 깊이 새겨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치매에 걸렸다고 해서,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고 해서 상담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인지능력이 떨어진 사람도 나름의 감정이 있고, 기억이 있고, 꿈이 있다. 치료자는 환자의 질병만 보아서는 안된다. 치료자는 아픔을 가진 ‘사람’을 보아야 한다.

오늘도 한껏 멋을 낸 할머니는 진료실에 들어와 앉는다. 그리고, 내 얼굴을 빤히 보면서 ‘이 사람이 누구더라…….’ 잠시 기억을 더듬는다. 내가 요양시설의 간호사가 보내준 편지를 보며 증상을 확인하고 상담을 시작하면, 할머니는 문득 생각난 듯이 환한 얼굴로 말한다.
 
오늘 꿈을 꿨어요. 하늘나라 꿈이었지요. 고운 구름이 꼭 바다의 백사장처럼 펼져져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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